속리산둘레길

평전치 원시림의 품에 안긴 길, 둘레길이 아니라 대간길이다. 속리산둘레길 괴산9구간코스

어랑 김주호 2025. 7. 22. 11:58

단원 김홍도가 현감으로 있던 연풍에는 둘러볼 것이 많이 있다. 연풍전통시장앞을 출발해서 연풍향교, 연풍초등학교내에 있는 옛 연풍동헌, 카톨릭순교자들을 위한 성지 등 역사적인 유적지를 보고나면 길은 화성마을, 진촌마을, 분지제라는 저수지로 이어진다. 여기서부터는 깊은 산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분지리 끝자락부터 임도를 따라 원시림같은 숲을 즐기고, 임도끝에서 약간의 노고가 드는 등산로를 오르면 만나게 되는 곳이 평전치이다. 괴산과 문경사람들이 장을 보기 위해 넘어 다녔다는 옛고개다. 이만봉에서 백화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기도 하다. 여기서 길은 시원한 풍광과 함께 문경구간으로 이어진다. 때묻지 않은 자연과 역사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시작점 : 호소사열녀각(행촌리)
호소사열녀각(행촌리)↔상내1리회관(16.8km)
5시간 5분 / 난이도: 중상(中上)

평전치 원시림의 품에 안긴 길, 둘레길이 아니라 대간길이다. 속리산둘레길 괴산9구간코스
https://youtube.com/watch?v=fH6ycyPJwJk&si=TfUjHqn3AjrCPUAO

 

원시림의 품에 안긴 길, 속리산둘레길 9길을 걷다
괴산에서 문경까지, 시간과 자연을 밟는 깊은 발걸음
2025년 5월, 봄빛이 고요히 번지는 아침. 속리산둘레길 9길, 총 16.8km의 숲길을 걷기 위해 우리는 충북 괴산 연풍전통시장 앞에 모였다. 길의 시작점, 호소사열녀각이 옛 충절의 이야기를 안고 조용히 서 있었다. 바로 옆 전통시장은 이른 시각인데도 이미 삶의 온기로 가득했고,  조끼를 입은 우리 일행은 두근거리는 발걸음으로 출발을 알렸다.
조금 걷자마자 고색창연한 연풍향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긴 세월이 만들어낸 이끼 낀 담장과 낮게 드리운 기와지붕은 단순한 문화유산이 아니라, 걷는 이에게 인사라도 하듯 조용히 말을 건넨다.
길은 연풍초등학교 교정을 지나며 잠시 일상의 풍경과 교차한다. 운동장 한켠, 복원된 연풍동헌이 보인다. 이곳은 조선 후기 화가 단원 김홍도가 연풍현감으로 부임했던 장소. 그가 이곳에서 어떤 마음으로 붓을 들었을까, 잠깐이지만 상상의 시간을 지나친다.
신앙의 길, 묵상의 길
학교를 지나면 연풍성지로 이어진다. 묵직한 분위기 속, 잔잔히 이어지는 ‘십자가의 길’은 병인박해 시기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지켜낸 땅의 기억을 품고 있다. 신앙과 고난의 역사를 지나며, 숲길은 자연스럽게 사색의 길로 전환된다. 어느새 우리도 조용해졌다. 이 길에선 누구도 크게 말하지 않는다. 길이 주는 울림에 귀 기울일 뿐이다.
연초록 분지, 그리고 고요한 마을들
성지를 지나 다시 흙길로 접어들자 진촌마을 유래비가 우리의 존재를 반긴다. 전통과 현재가 나란히 흐르는 마을을 지나, 드디어 분지제 저수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특이하게도 이 저수지는 흙둑이 아닌 시멘트 둑방으로 조성되어 있다. 양 옆으로 연초록빛 산과 물이 반영되어 몽환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바람이 잔잔해지니, 물 위의 반영도 거울처럼 고요하다. 사진기를 든 몇몇 일행은 저마다의 앵글로 이 순간을 붙잡는다.
곧이어 보이는 이만봉 오르는 백두대간 안내판. 이 길이 단순한 둘레길이 아닌, 한반도의 대동맥인 백두대간과 이어져 있음을 새삼 실감한다. 최근 지어진 분지리 마을회관을 지나 아담한 안골마을에 들어서자 본격적인 임도가 시작된다. 
원시림으로 들어서다
길이 점점 좁아지고, 사람의 기척이 사라진다. 전파도 닿지 않는 이 숲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시간 속에 있는 듯하다. 수십 년 자란 소나무, 참나무, 졸참나무들이 터널을 만들고, 그 아래로 흐르는 바람과 새소리, 낙엽 밟는 소리만이 걷는 이의 동반자가 된다.
모처럼의 평밭등. 이름처럼 완만한 구릉지로 이루어진 등판을 지나 곧이어 짧지만 숨이 찬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괴산군에서 확장 중인 이 구간은 아직 거친 길이 남아 있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리자가 말을 건넨다. “여러분들이 이 길을 처음 걷는 분들입니다.” 그 한 마디에 우리는 조금 더 힘을 내어 발을 내딛었다.
평전치에서 시간과 조우하다
산등성이를 힘겹게 오르다 보니 드디어 고개마루인 **평전치(平田峙)**에 닿는다. 이곳은 괴산과 문경을 잇던 옛 고갯길이자 백두대간의 주능선. 바람이 세차게 불지만 시야는 시원하게 터진다. 산자락 너머 멀리 겹겹이 겹쳐진 능선들. 잠시 숨을 돌리며 백두대간의 숨결을 느낀다.
> “이 고갯길은 수많은 장꾼들과 산객들이 넘던 길입니다. 나 역시 25년 전부터 이곳을 수없이 지났고, 오늘 이 자리에 다시 서니 참 묘합니다.” 同行자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문경의 품으로 내려서며 고개를 넘으면 풍경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완만한 내리막길, 그리고 조용한 만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절집은 작고 아담하지만, 단정한 법당과 정원은 깊은 고요를 품고 있다. 누군가는 차 한 잔, 누군가는 벤치에 앉아 잠시 눈을 감는다. 마음속 소란이 잠잠해지는 순간. 길은 점점 마을로 내려가고, 상내1리와 2리 갈림길이 보인다. 계곡물이 졸졸 흐르기 시작하며 속리산의 품이 멀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마침내 상내1리 마을회관 도착.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 우리의 16.8km 여정도 끝이 난다. 
걷고 난 후의 이야기
지친 몸과 대비되게 마음은 가벼워진다. 속리산둘레길 9길은 단순한 걷기의 연속이 아니었다. 자연의 품, 역사와 믿음의 자취,
그리고 조용한 묵상이 고요히 흐르는 길. 걷는 내내 누군가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우리 또한 그 길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 발자국은,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